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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식 세피아는 추억을 안고 달린다

274 2019.06.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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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가 1992년 9월에 출시한 세피아는 회사 최초로 독자 개발한 준중형 승용차이다




자동차는 참으로 재미있고, 신기한 물건이다. 운전자에 따라 수행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이동수단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랜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지금 소개할 남자는 스무 살 시절의 기억과 감정을 살리기 위해 20년 넘은 올드카를 탄다.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40대 남성이 첨단 옵션을 갖춘 신차 대신 올드카를 타는 이유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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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세피아는 경쾌한 주행성능으로 출시 7개월 만에 11만 대 이상을 판매했다. 당시 승용차 가운데 최단기간 10만 대 판매를 돌파한 모델이기도 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이선동 씨의 차는 기아차의 첫 고유모델이자, 국내에서 처음으로 디자인부터 플랫폼까지 독자 개발한 준중형 승용차 세피아다. 마쓰다와의 합작 모델 생산이 무산되면서 홀로서기를 선택한 기아차가 총 개발비 약 5300억 원을 투입해 탄생시킨 귀중한 모델이기도 하다. 덕분에 국내 및 해외 시장에서 기아차만의 독자 마케팅 전략 수립과 전개가 가능했으며,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기아차 최초로 유럽에 수출한 모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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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동 씨는 세피아를 타면 스무 살 때의 풋풋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하지만 이선동 씨에게 이런 히스토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1993년식 세피아를 구매한 것은 지난해 이맘 때쯤, 온라인 동호회를 통해서다. 1년 가까이 매물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동호회 게시판에 직접 글을 올릴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가 이토록 애타게 세피아를 찾은 건 스무살 시절 자신의 아련한 추억 때문이다.

“세피아를 타면 스무 살 때의 풋풋한 기억들이 떠올라요. 대학 새내기 때 친구 한 명이 세피아를 타고 다녔는데 세피아를 처음 보던 순간,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판매되던 차들 가운데 외관 디자인이 가장 날렵하고 멋있었죠. 무엇보다 실내가 압권이었는데, 인테리어는 지금 봐도 요즘 차 못지않게 잘 빠졌어요. 계기판도 감각적이고, 운전석 쪽으로 기울어진 공조 및 오디오 시스템도 매력적이었어요. 언젠가 반드시 이 차를 타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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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동 씨가 첫눈에 반한 세피아의 인테리어. 그는 운전자 중심의 실내 디자인이 자신을 매료시켰다고 밝혔다




이선동 씨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세피아를 신주단지처럼 모셔만 두지 않았다. 애지중지 아끼기는 하지만, 자동차의 본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주행도 자주 하고 있다. 그는 총 3대의 차를 가지고 있는데, 세피아와 다른 두 대의 차를 번갈아 가며 운행한다고 한다. 그건 세피아가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뜻이다.

“세피아가 출시 당시에는 주행성능이 최고 수준으로 꼽히던 차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죠. 요즘 차에 비하면 출력도 떨어지고, 기어 변속할 때 진동도 커요. 하지만 이런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좋아요.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부족한 모습이 더 매력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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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으로 차량 랩핑을 하고 있는 이선동 씨는 세피아 전체를 초록색으로 바꾸기 앞서 주유구에만 시범적으로 색상을 적용했다




실제로 그는 개폐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진 조수석 창문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편해도 작동이 안되는 건 아니니 느린 대로 쓰고 있어요. 정 문제가 되면 그때 수리하면 되죠. 저는 차량 노후화로 나타나는 증상들은 심각한 결함이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둬요. 사람도 늙으면 관절이 안 좋아지잖아요. 같은 맥락이에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받아들여야죠. 수술해서 완벽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요. 올드카를 타는 맛이 없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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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서는 고급 옵션이었던 인켈의 오디오 시스템. 이선동 씨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이퀄라이저 그래픽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세피아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순정 오디오 시스템이다. 이선동 씨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오디오의 이퀄라이저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올드카 중에서 순정 오디오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외관은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더라도 블루투스나 후방 카메라 등의 편의성 때문에 실내는 바꾸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제가 구입한 세피아는 운 좋게도 순정 상태 그대로였어요. 이퀄라이저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작동돼서 순정 오디오로 음악 듣는 재미가 쏠쏠해요. 특히 차에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면 정말 느낌이 좋아요. 적당히 노이즈가 낀 음질이 오히려 그 시대의 감성을 되살려주는 것 같거든요.”

그의 말처럼 차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수 있었던 까닭은 당초 매물로 나왔던 세피아의 상태가 최상급이었기 때문이다. 구매 당시 세피아의 누적 주행거리는 겨우 8만 km였다. 특별히 손 댄 부분도 없다. 주유구 부분의 부식을 제거하고, 브레이크 실린더를 교체한 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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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는 시대를 대표하는 준중형 승용차로서 1993년 대전 엑스포의 공식 차량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여러 대의 올드카를 보유한 경험이 있지만, 세피아는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고 한다. 자신의 추억은 물론, 다른 이들의 향수까지 자극하는 차기 때문이다. 하루는 후배를 통해서 차량 목격담을 전해 들은 경험도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초기형 세피아 목격담이 올라왔는데, ‘한눈에 봐도 선배의 차였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순간이 뿌듯하고 보람차다고 말한다.

“세피아는 가는 곳마다 이야깃거리가 돼요. 어디를 가든 오랜만에 봤다면서 반겨주거든요. 제 추억 때문에 구매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추억도 끄집어 낸다는 점이 좋아요. 뭐랄까, 추억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거죠. 그게 올드카의 매력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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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형 세피아의 특징인 슬림형 헤드램프와 크롬이 쓰인 라디에이터 그릴. 이선동 씨의 차는 특별한 변형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선동 씨는 세피아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운행하며 간직할 계획이다. “세피아를 주행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면서 평생 소장하는게 제 목표이자 소망이에요. 은퇴한 뒤 교외에 너른 마당과 차고를 가진 주택에서 차를 만지며 살고 싶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이 차를 물려주고 싶어요. 아이가 '아빠가 좋아했던 차'라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올드카를 타는 대부분의 사람이 차를 통해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릴 거예요. 아들이 이 차를 몰면서 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되새김질 했으면 좋겠어요." 결국 이선동 씨가 정의하는 올드카는 ‘지나간 세월을 아련하게 떠올리게 해주는 존재’였다.  



출처:HMF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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